2024년 3월호
뭉근하게 버티는 김세정 #ELLE_D에디션
(출처 엘르코리아)
꺼지지 않고 뭉근하게 버티는 불씨처럼 가늘고
오래도록 빛나는 세정의 순간들.
Q. 지난해 9월 첫 단독 콘서트 〈The 門〉으로 팬과 만났습니다
A. 행복하고 영광이었어요. 드라마 〈사내 맞선〉 〈경이로운 소문〉으로 활동했지만 팬과 직접 만난 건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그래서 더 부족함을 느꼈어요. 많이 반성했죠.
Q. 어떤 면에서 반성했나요
A. 무대에 선 것 자체가 너무 대단한 일이지만, 데뷔 8년 차로서 무대를 완벽하게 꽉 채웠냐 하면 그건 아니었어요. 연습해야 할 게 너무 많고, 아쉬움이 컸죠. 팬이 많이 늘어난 만큼, 완벽한 무대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Q.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A. ‘빗소리가 들리면’ 마지막 부분에 ‘널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라는 구절이 반복돼요. 그 구간에서 팬들이 ‘떼창’을 하는데 울컥하더라고요. 1·2·3절 떼창 구절이 다 달라요. 그 구절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데, 팬들이 함께 불러주니 진한 위로처럼 들렸어요. 가끔 사랑한다는 말이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는데, 막상 팬과 만나 그 곡을 부를 때는 전혀 버겁지 않고 행복감이 차오르더라고요.
Q. 첫 번째 정규 앨범 〈문(門)〉에서 수록곡 대부분의 작곡과 작사에 참여했어요
A. 언젠가 앨범이 완성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밖에 없었어요. 지난 3년간 꾸준히 음악 작업을 했거든요. 그런 곡들을 모아보니 열심히 만들었다고 공개하기에는 너무 ‘오합지졸’ 같은 거예요. 그러다 문득 솔직한 내 마음을 담은 창작물이기도 하고, 팬들이 사랑해 줄 노래인데 왜 자신감이 없을까 싶었죠.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안 쓴 곡이어도 내 곡이라고 느낄 수 있는 포인트를 넣고 싶었어요. 그래서 모든 곡에 내 이야기를 담은 가사를 얹은 거예요.
Q. 트랙을 순서대로 들어보니 세정의 야심과 도전, 맞선다는 인상이 강하게 느껴졌어요
A. 제가 쓰는 곡의 대부분이 도전과 관련된 이야기이기는 해요. 도전하는 걸 좋아하고, 또 ‘세정이는 여전히 도전하는 중이구나’를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죠. 꿈꾸는 사람들에게 무너지지 않고 계속 꿈꾸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강한 것 같아요.
Q. 모험을 즐기죠
A. 상당히요.
Q. 도전의 아이콘으로 불리기도 해요
A. 어쩌다 그렇게 됐죠(웃음).
Q. 그럼에도 두려움이 몰아치는 순간도 있을 텐데
A. 일단 맞서고 봐요. 이만큼 성장한 것도 맞섰기 때문이죠. 예전에 친구가 이런 말을 했어요. 준비 안 된 채로 거센 파도에 잘못 뛰어들기보다 준비되면 안전하게 뛰어들려고 한다고요. 저는 항상 ‘냅다 모르겠다’ 하고 달려들었어요. 거대한 파도가 덮쳐도 어떻게 해서라도 넘었던 기억밖에 없어요. 넘고 나니 생각보다 무거운 일이 아니었고, 또 다른 파도를 거침없이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까지 생겼어요. 이제는 모험과 파도가 없으면 두려워요.
Q. 계속 맞서다 보면 피로해질 텐데
A. 그래서 충분한 휴식을 갖는 게 제 철칙이에요. 이 정도까지 하면 난 한계를 느낄 테니 잠깐 쉬자. 이게 루틴이 된 것 같아요.
Q. ‘Top or Cliff’의 뮤직비디오에서 ‘정상에 서고자 평생 자신을 절벽에 내몬 여자의 이야기’라는 서사와 함께 과감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놀라웠어요
A. ‘항해’ ‘Top or Cliff’를 만들 때 뮤직비디오 감독님과 자주 논의했어요. 곡과 가사를 만들 때 나만의 생각과 이유가 분명히 보이도록 하는 편이에요. 작업하면서 머릿속에 장면을 그려요. 내가 봐온 영상과 담고자 했던 가사의 뜻, 작업하면서 느꼈던 감정 등 모든 것을 감독님께 털어놓았어요. 그리고 감독님이 영상으로 표현해 주셨고요.
Q. 작업 과정에서 참고했던 영화는
A.〈블랙 스완〉. 타인을 적으로 생각했는데 가장 큰 적은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서사가 크게 와닿았고, 저도 그런 편이었어요.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건 나거든요. 이런 주제를 담으려 했어요.
Q. 12월에 시작해 2월 18일 막을 내린 자폐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 〈템플〉도 새로운 모험이었을 것 같아요
A. 엄청난 도전이었죠. 차츰 잘해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연극 무대는 매일 딜레마이고 성장하는 시간이에요. 특히 〈템플〉은 더 그래요.
Q. 어떤 의미에서 딜레마이자 성장의 시간일지
A. 뮤지컬은 정해진 약속만 보고 달려가는 느낌이 크다면 연극은 매일 내게 어떤 감정이 올지 몰라 시작하기도 전에 두려워요. 무대에 섰을 때조차 ‘오늘 만약 내가 생각한 그 감정이 안 느껴지면 어쩌지?’ ‘잘해야 하는데’ 하고 계속 걱정해요. 이런 생각은 무대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해요. 생각을 버리고 장면과 상황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하는데…. 깨닫는 게 많아요.
Q. 실존 인물의 이야기라 연기에 더욱 무게가 실렸을까요
A. 단순히 실존 인물을 따라 하기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회로의 인물을 만들었어요. 그래야 사소한 표현도 분명히 보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극을 앞두고 템플 그랜딘이라는 인물만 연구하기보다는 여러 경우와 넓은 스펙트럼을 고려했어요. 자폐에 치중하기보다 아이의 모습을 분석했죠. 아이는 새로운 걸 신기해하고 반가워하며, 작은 것에 슬픔을 느끼잖아요. 그렇게 순수한 모습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Q. ‘문’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가 클 것 같아요. 연극은 매일 자신만의 ‘문’을 넘는 템플의 삶을 다뤘고, 정규 앨범 제목도 문이죠
A. 맞아요. ‘문’을 넘고 난 후부터 그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표현한 극이죠. 저도 이 극을 통해 뛰어넘고 싶은 문이 있었어요. 스스로를 많이 고민하며 한계를 넘다 보니 주변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Q. 세정의 삶도 달라졌군요
A. “사랑은 누군가 성장하길 바라는 거야.” 〈템플〉에 나오는 대사예요. 매일 도전하고 성장하길 바라는 내가 제일 나를 사랑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진짜 성장하고 싶다면 자신을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점을 연극을 통해 가장 크게 느꼈어요. 앞으로 내가 전해야 하는 메시지도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전할 수 있는 방식을 알게 된 거죠. 다시 넘어야 할 문에 대한 대비나 준비를 명확하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Q. 뮤지컬과 연극, TV 드라마까지 연기 폭을 다양하게 넓혀가고 있습니다. 스스로 이런 경험의 다채로움을 느끼나요
A. 그렇죠. 뮤지컬, 방송 연기, 연극은 서로 연관돼 있지만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연기를 분류해 가며 체득하고 있어요. 새로운 연기를 앞두고 용감하게 임할 수 있는 길을 잘 다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어제도 뮤지컬 보고 왔어요. 연기에는 정답이 없어요.
Q. 글로벌 걸 그룹 오디션 프로그램 〈유니버스 티켓〉에서 심사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프로그램을 통해 내 연습생 시절을 돌아봤을 것 같아요. 그때의 세정은 지금과 얼마나 다를지
A. 연습생 시절의 나를 닮고 싶어요. 힘든 줄도 모르고 겁 없이 도전했으니까요. 지금은 겁도 많고 그 겁을 이겨내기 위해 다시 강해지려고 노력한다면, 그때는 무서운 게 뭔지도 모르고 마구 뛰어들었어요. 그런데도 마냥 신났죠.
Q. 세정이 믿는 것은
A. 인과응보, 사필귀정.
Q. 왜요
A. 저는 노력의 힘을 믿어요. 노력이 늘 옳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노력은 가치 있는 일이거든요. ‘저 사람은 열심히 안 했는데 왜 내 결과보다 더 훌륭할까?’라는 생각은 필요 없어요. 분명 내가 한 만큼 돌아오거든요. 지금껏 쌓아온 노력과 힘, 선한 기운이 존재한다면 언젠가는 훌륭한 결과를 안겨줄 거예요. 그렇게 믿고 오래 지켜보는 게 중요하죠. 지금 당장 무너지지 말고.
Q. 절대 잃기 싫은 것은
A. 뜨거움. 내 열정, 꿈과 미래에 대한 행복과 기대감은 뜨거움에서 비롯돼요. 가족, 일, 사랑, 모든 것에서 뜨거움만큼은 절대 잃고 싶지 않아요.
Q. 나를 자극하는 꿈과 목표의 교집합은
A. ‘왜’! 처음 꿈을 갖게 된 계기도 ‘왜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지금의 내가 존재하는 데도 분명한 이유가 있어요. 학창시절의 어떤 사건이 나에게 이런 성격을 만들어줬고, 내 목소리는 기질 때문이거나 어릴 적 어떤 특성 때문이겠죠.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어요. 자꾸만 ‘왜’라는 말로 아무리 파고들어도 지치지 않게 하는 모든 것이 꿈과 목표가 되는 것 같아요.
Q. 지금 행복한가요
A. 적당히! 우선 연극을 잘 끝내고 푹 쉬어야죠. 그때 온전히 행복해지려면 지금은 적당히 행복해야 해요.
Q. 지난 8년을 한 줄로 요약한다면
A. 매일 나보다 큰 파도, 결국 넘어내는 나. 저는 바다를 워낙 좋아해서 은유 소재로 자주 써요. 바다가 인생과 닮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등에도 파도 그림이 있죠(웃음).
Q. 앞으로 어떤 세정으로 채워나갈 건가요
A. 2023년 12월 31일부터 마음속 슬로건이 ‘뭉근하자’예요. 여린 불길이 오랫동안 꾸준히 뜨겁다는 의미죠. 저는 항상 스스로를 태우기에 바빴던 것 같아요. 아주 크게 태워버리고 잠깐 쉬는 패턴을 반복했죠. 이제는 오래오래 뜨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요. 뜨겁지 않은 건 내 철학상 없으니 태워버리지는 말고 꾸준히 뜨거울 수 있도록 뭉근하자.
영상
비하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