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호

Red energy
(출처 씨어터플러스)

뮤지컬 <레드북>은 배우 김세정이 말하는 김세정을 듣는 시간이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잭슨 폴록의 그림은 물감을 튀기고 흡뿌려서 완성한다. 물감이 캔버스에 올려지기 전까지, 색이 겹쳐지고 겹쳐질 전까지는 어떤 작품이 완성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예상 밖에서 탄생하는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격정적인 물감들의 발자취가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게 다가온다. 2017년 트라이아웃과 2018년 초연을 거쳐 2021년 재연으로 돌아온 <레드북>을 통해 두 번째 뮤지컬 무대에 오르는 김세정. 그에게 어떤 '안나'를 보여주고 싶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돌아온 답은 자연스럽게 잭슨 폴록의 작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처럼 김세정의 '안나'는 쉽게 예상할 수 없어 재미있고, 생생하게 살아있어 더욱 큰 울림을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뮤지컬 <귀환> 이후 두 번째 무대예요. 아직 많이 설렐 것같은데 어때요?
사실 제 최근 활동들은 여태껏 해오던 것들이었거 든요. 작곡도 해오던 거였고, 음반 작업도 해오던 거였고요. 그런데 뮤지컬을 하면서 제가 새롭게 배우는게 생긴 거예요. 음악이 다르니 발성도 새롭게 다지기 시작했고, 평소에 제 노래를 했을 때 잘 안 되던 부분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할 수 있었 죠.

그동안 연기와 음악 활동은 꾸준히 해왔는데, 어떤 면에서 새로움을 느꼈나요?
연기 같은 경우는 드라마와 달리 동선도 이용해보고 감정을 쌓아가는 방법을 알아갈 수 있어요. 특히 움직임 하나하나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걸 생각도 못 해봤는데, 다른 방향의 생각들을 배울 수 있어서 기쁜 마음이에요. 노래는 제가 그동안 춤을 곁들인 가요를 불러왔잖아요. 물론 그 곡들도 가사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신나는 가요들을 보면 거의 소리 위주예요. 지금까지의 저는 소리 내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던 거죠. 뮤지컬을 하면서 왜 그 박자에 이 단어가 들어가고, 왜 이 음이 쓰였는지 배우고 있어요. 새로운 걸 하나씩 배워 갈 때마다 도장 깨기 하는 기분이에요.

<귀환>은 코로나19 확산으로 대면 공연을 올리지 못했죠. 아쉬움이 컷을 것 같아요.
아쉬웠는데, 정말 솔직한 마음으로는 조금 안심했 던 것 같아요. 온라인으로 송출되면 그동안 제가 했던 것과 다를 게 없어지거든요. 해왔던 걸 그대로 하면 되니까 마음이 편했어요. 무대용으로 공연을 준비하다가 송출로 바뀐다는 이야기를 듣고 송출용으로 바꿔서 연기하고 노래했어요.

생중계 라이브였는데도 무대와 송출 연기가 명확하게 구분 지어지던가요?
아무리 무대 위에서 연기한다고 해도 카메라가 들어오게 되면 프레임 안에 어떻게 잘 담길 것인가
를 고민해야 하거든요. 그래서 무대 위 동선보다 카메라에 담기는 장면이 중요해져요. 노래도 송출용으로 하게 되면 호흡을 많이 섞어도 돼요. 일반적인 가요처럼 불러도 되는 거죠. 하지만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직접 전달할 때는 관객들이 노래를 통해 감정 이입을 해야 하고,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끔 해야해요.

뮤지컬음악에 대해서도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네요. 평소에도 뮤지컬에 관심이 많았나요?
아뇨. 처음에는 잘 몰랐어요. 선배님들 공연을 한 두 번 본 정도. 그런데 제가 뮤지컬 <시카고>를 보고 흠뻑 빠진 거예요. 지금 <레드북>을 함께 하고 있는 아이비 선배님의 무대였죠. 그때부터 관심을 두게 되고 뮤지컬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귀환>에 도전한 거고요. 뮤지컬을 해보니까 뮤지컬을 좋아하기만 했을 때는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잖아요. 재미있는게 영화나 드라마를 찍을 때는 저와 카메라 감독님 간의 연기거든요. 그런데 뮤지컬은 무대 모든 요소가 살아있는 거예요. 앙상블 분들도 각자의 캐릭터가 있고, 무대가 전환되고 움직이는 것들도 다 사람들이 손 쓰는 일이에요. 장면 속에 죽어 있는 것들이 하나도 없어요. 그게 너무 벅차요. 이제 제가 그걸 볼 줄도 아니까 너무 재미있어요.

<레드북> 캐스팅 당시에는 어떴나요?
자세히 알고 있던 작품은 아니었어요. 작품을 제안받고 대본을 읽어보니까 재미있을 것 같고, 의미도 좋고, 노래도 좋아서 꼭 하고 싶었어요. 그때는 안나 역으로 어떤 분들이 함께하는지 모르는 상태였는데, 이후에 아이비 선배님과 차지연 선배님이 함께하신다는 거예요. 그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왜?'였어요. '이렇게 대단한분들이 나와 함께 한다고?'였던 거죠. 그런데 작품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제 쪽이 '왜?'였던 결 깨달았어요. 그와 동시에 의지가 강해졌어요. 좋은 작품이니까 제가 확실하게 잘 해내야겠다는 마음.

잘 알지 못 했던 작품에서 애정 가득한 작품으로 바뀐 거네요. 스스로에게 <레드북>은 어떤 작품인가요?
지금의 저에게 큰 위로가 되는 작품. 연습 초반에 장면과 넘버를 해석하다가 혼자 울었어요. 넘버중에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이라는 곡이 있거든요.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말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해석하면 할수록 안나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던 거예요. 사실 제가 그동안 활동하면서 제 성격이 대중들이 원하는 아이돌의 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건가 하는 고민이 많았어요. 팬분들이 좋아해 주시고 저 스스로 장점이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아이돌답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이돌다운 모습이 따로 있는 걸까 싶었죠. 또 한편으로는 저의 이런 모습이 팬분들을 힘들게 하진 않았을까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요. 팬분들은 저를 좋아해 주는 동시에 저를 보호해주는 입장이잖아요. 제가 아이돌다웠다면 감당하지 않아도 될 부분들 이 있었을 텐데... 이런 고민들이 가사에 다 담겨 있어서 노래를 부르다가 위로를 받아요. '내가 나여도 된다.' '나를 지우려고 하지말자.' 이런 위로들이요.


김세정 배우의 공연을 보는 팬분들에게도 위로가 될 것 같아요.
방금 말씀 드린 곡에 이어서 '레드북을 읽고 난 후'라는 곡이있어요.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나오는 넘버인데, '네 덕분에 나도 나처럼 살 수 있었어. 난 너한테 참 위로를 많이 받았어. 나의 세상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이런 내용을 담고 있어요. 그런데 마침 제 팬클럽 이름도 '세상'인 거예요.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었죠. 연습 때 다음 장면 들어가겠다고 하는데도 못 추스르고 울고 있을 정도였어요. <레드북>은 제게 위로와 행복을 전해주는 뮤지컬이에요.

스스로 안나와 어떤 점이 닮았다고 생각해요?
거짓말을 못 한다는 점이요. 제가 거짓말을 너무 못해서 착하게 살자는 마음을 먹게 됐어요.(웃음) 하얀 거짓말을 적당히 하면 넘어갈수 있는 일인데도, 그러지 못하는 편이라 그냥 열심히 살고 있죠. 말도 숨김 없이 있는 그대로 하는 편이에요. 표면적으로 보다 보면 세게 받아들이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 저는 솔직한 방법밖에 몰라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거거든요. 안나도 그런 사람이에요. 시대상과 맞지 않아서 나쁘게 비친 사람이지 첫사랑밖에 모를 정도로 순수해요. 자신에게 소중한 이야기니까 다른 이들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건데, 다른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보는 거죠. 그런 모습이 참 공감가더라고요.

연기할 때 닮은 점을 먼저 찾는 편이에요?
그런 것 같아요. 세상 사람 모두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들이 있고, 자리 잡은 성격이 분명하게 있지만 단면적이지 않고 다채롭잖아요. 그런것처럼 제 안에도 닮은 점이 분명히 하나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 부분을 먼저 찾아요.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무엇인가요?
각막의 1장을 좋아해요. 막이 시작될 때 모든 배우가 등장하잖아요. 특히 '밝은 침대를 타고'는 제가 관객으로서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막 폭발할 것같아요. 무대 위의 에너지를 보다가 팡! 하고 터질 것같은 느낌. 조명 하나 정도는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쳐요.

얼마 전 라디오에서 처음으로 <레드북> 넘버를 선보였잖아요. 굉장히 떨렸을 것 같은데 어떴어요?
최대한 무대에서 하던 것처럼 부르려고 했지만, 따지고 보면 송출이라 살짝 바꿔 부른 게 있어요. 또 이어폰을 꽂고 부르니까 실제로 제가 부르는 것과 조금 다르게 들려서 '지금 이렇게 하는 게 맞나?' 혼란이 오기도 했고요. 그리고 제가 뮤지컬 무대를 정식으로 선보이는 게 처음이다 보니 관객 분들은 제가 어떻게 할지 궁금하실 거잖아요. 그분들 앞에 처음으로 저를 보여주는 느낌이라 굉장히 긴장되고 불안했죠. 그래도 확신이 생겼어요. 정말 좋은 무대를 보여줄 수 있겠다는 확신! 그 확신의 첫단추를 끼워준 것이 라디오 스케줄이었어요.

아이비 배우, 차지연 배우와 함께하면서 배우는 점도 많을 것 같아요.
엄청 많죠. 일단 아이비 선배님은 에너지가 차원이 달라요. 단 한 장면도 그냥 흘러가는 게 없어요. 캐릭터가 살아있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껴요. 차지연 선배님은 순간 집중력이 엄청 나셔서 연기적인 면에서 배울 점이 정말 많아요. 그래서 아이비 선배님을 봤을 때는 캐릭터적인 면이나 에너지를 이렇게 가져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차지연 선배님을 보면 연기의 몰입도나 장면을 잡아 먹어야 할 때 이렇게 하는 거구나를 파악하게 돼요. 또 두 분은 노래 스타일도 정말 다르시거든요. 맑고 캐릭터성을 가진 아이비 선배님과 무대 장악력과 강렬함이 가득한 차지연 선배님 모두 제가 얻어갈 게많아요. 양쪽으로 좋은 교과서를 두고 있으니 배우는 입장에서 신이 나죠.

작품에 함께 하면서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함께 생활하다시피 연습에 참여하고 있잖아요. 분위기는 어떤지 궁금하더라고요.
저희가 단체 채팅방이 있는데, 이렇게 활성화가 잘되어있고 활발한 채팅방은 처음이에요. 하루의 시작부터 끝까지 웃는 것 같아요. 사진도 정말 많이 올라오거든요. 어떤 선배님은 아침부터 삼겹살을 굽고 있고, 다른 선배님은 아이의 볼을 물고 있는 사진을 올리고, 또 야식 사진은 매일 같이 올라오죠. 평소에는 어느 현장을 가도 제가 가장 활동적이었는데, 여기는 다들 활동적이에요. 개인적으로 <레드북>에 참여하면서 이 부분이 가장 행복 했어요. '그동안 내가 넘치는 에너지를 분출 했던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구나. 여기는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도 되는 곳이구나.하고요. 이 생각이 작품과도 이어져 있어요. <레드북>에서 하고자 하는 말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거든요. 연습하면서 느낀 것들을 무대에서 표현하면 될 것 같아요.


연기하는 김세정이 주목받으면서 '노래하는 김세정이 지워지지 않을까.'라는 고민이 있었다는 인터뷰를 봤어요. 뮤지컬 무대는 연기와 노래를 모두 소화해야 하는 곳이니 앞선 고민을 해소할 수 있었을까요?
노래에 대한 갈망도 있지만, 무대 연기에 대한 갈 망이 더 컸던 것 같아요. 제가 연기자로서 부족한 점을 채우고 싶었거든요. 제가 생각 했을때 저는 작품 전체를 끌고 가는 힘이나 발성 등이 아직 부족한 것같았어요. '나는 연기도 할 수 있고, 노래도 할 수 있으니 뮤지컬 무대를 해봐야겠다.' 이런 생각이 아니라, '나는 연기도, 노래도 아직 부족한 점들이 있으니 뮤지컬을 하면 더 발전할 수 있겠다.'예요. 뮤지컬은 저의 부족함을 채워나가는 하나의 도전인 거죠.

배우 김세정이 생각하는 김세정은 어떤 사람이에요?
사람 냄새 나는 사람. 예전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 왔어요. 저는 제 나이대처럼 산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 나이에 맞는 실수들도 하고, 연예인이 아니라 그냥 김세정이라는 한 사람으로 느끼게끔 말하려고 해요. 그런 모습에서 인간미가 넘치는 거죠. 사람 냄새가 난다는 말 자체가 저를 보여 주는 것 같아요. 한때는 저 자신을 막았던 적이 있어요. 이미지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요. 그 순간 저를 잃어버렸던 것 같아요.

다시 '진짜 김세정'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가 있어요?
어차피 저는 그렇게 못 살더라고요.(웃음) 내 인생인데 그냥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어떤 무대를 보여주고 싶나요?
배우들끼리 다 같이 앉아서 이야기한적이 있는데, 작품 마지막에 '당신의 아야기를 들려줘요'라는 넘버가 있어요. 작품을 보고 돌아가는 길에 '내 이야기는 무엇일까?' 하고 한 번쯤 생각하시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관객들이 김세정의 안나를 어떻게 봐줬으면 하나요?
연습하면서 배우들끼리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해요. 이게 나쁘게 들리기보다 칭찬이거든요. 어디로 불지 모르겠다는 거죠. 저를 물감이 가득 차있는 물통 옆에 있는 도화지처럼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떤 색이 입혀질지 예상할 수 없는 재미와 긴장감이 가득한 안나로요.